새로운 존재
새로운 존재
고린도후서5:17
사람은 새로워지는 경험을 가질 때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이사를 한 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많은 짐들이 하나씩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갈 때 그리고 많은 먼지들을 깨끗이 닦아내고 난 뒤 거실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은 평화를 누립니다. 이후에 집의 안팎이 어지럽혀져서 다시 청소를 하여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게 될 때, 그 새로워짐에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한국에는 대중목욕탕이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등으로 인해 이곳을 이용하는 것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추석이나 설 전에 아버지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가서 묵은 때를 벗겨내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때를 밀어주셔서 깨끗해지고 새로워져서 목욕탕 문을 나와 밖의 공기를 들이마시게 되면 그 상쾌함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a new creation, a new person) 즉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존재는 중요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중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예수님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변화를 갖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어떤 분들은 하나님 사랑에 열심이어서 교회의 예배도 열심히 참여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이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서의 예배만큼, 또한 열심히 한 기도만큼 삶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전혀 실천이 되지 않는 다면 이것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신앙 이전의 삶보다는 새로워진 존재가 되어 집니다. 이전에 남을 열 번 미워 했다면 신앙 이후에는 일곱 번 정도로라도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좀 더 신앙이 성숙하면 다섯 번, 네 번, 세 번 정도로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이전에는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지만 신앙 이후에는 다른 이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힘도 강하고 싸움의 기술도 있어서 싸움을 하면 늘 이기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이 아이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았습니다. 또한 맞는 상대방 아이의 얼굴이 부풀어 오른 모습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이 깊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어린아이라 할 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존재가 되어지면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지 때문입니다. 물론 완전한 삶의 변화는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계적인 변화는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가치관을 내가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존재적 변화’ 가 있습니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지는 존재적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왕자와 거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한 나라와 왕자가 성 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알고 싶은 그 호기심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와 신분을 바꿉니다. 그래서 왕자는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자가 됩니다.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거지가 왕자로 존재적인 변화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위에서 말한 이 존재적 변화는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확실하게 바꿔주신 변화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존재적 변화’를 진실로 경험한 사람들은 가치관의 변화, 세계관의 변화를 반드시 경험하게 된 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정도는 그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가치관, 세계관이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것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교회 시절에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속에 ‘존재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2:47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무슨 말일까요? 진정한 존재적 변화를 받으면 예수님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바뀌기 때문에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타적인 삶 곧 다른 이웃들을 위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어 결국 긍정적인 칭송을 받게 되고 그래서 그 선한 영향력으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지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영상을 통해 한국의 목회자 일부와 교인들이 길거리에서 정치적인 집회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집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저들은 전혀 신앙에 대한 이해가 안 되어있는 일반 시민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방언을 하며 집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방송국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바울 역시 신앙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 방언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들이 사도행전2장에 나오는 지역방언, 곧 외국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기적적인 방언을 하면 찬성합니다. 오히려 이것은 기적적인 측면이 있어서 선교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언은 사도행전2장 이후에 저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다른 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존재, 이것은 너무나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치관,세계관이 달라지는 새로운 존재는 나를 피곤하고 손해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닮아 감으로 인한 영혼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 변화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골드코스트 사랑의교회
고광덕 담임목사
0451 472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