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조연
본문 요한복음 3장 22-30절
제목: 주연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조연
1. 들어가는 말
영화나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탁월한 주연들과 함께 주연을 주연답게 만들어 준 명품 조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품 조연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먼저 기본적으로 연기력이 탄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나 극 중에서 맡겨진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조연에게 맡겨진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능력이란 극 중에서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화나 극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명품 조연들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명품 조연 여호수아의 동역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가나안땅 정탐꾼으로 보냈을 때, 여호수아는 모세의 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말렉 사람들과 싸울 때, 여호수아는 모세의 손과 발이 되어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바사왕 아하수에로 시대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할 때, 에스더를 왕비로 준비시켜주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도록 도왔던 모르드개도 주연 에스더 못지 않는 명품 조연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구속의 사역에서 주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해드리고 돋보이게 해드린 명품 조연 세례 요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갑니다.(요3:6)
갈릴리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호 아이론 ὁ αἴρων)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예수님이 세례를 주자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로 몰려갔다면서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요3:6)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아니 그 사람 예수는 선생님께 세례를 받은 당신의 제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감히 제자가 스승의 사람들을 가로채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선생님, 당신의 제자 예수를 타일러서 그런 무례한 일을 다시는 하지 못하게 하소서.’라는 뉘앙스로 세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을 존경하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행동이 이전에 자기들의 선생님이 예수님에 대해서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1:27)’라고 증언했던 것과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선생님이 증언했던 그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선생님에게 도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강력한 경쟁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자기들의 선생님인 세례 요한이 그 경쟁자에게 점점 밀리는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인기가 떨어지면 자신들의 인기도 함께 떨어지고,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독점적인 지위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3.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절)
하지만 요한의 제자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은 쇠해지더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베푸는 세례는 단순히 사람에 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요3:27절) 요한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절)”라는 멋진 은퇴사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하늘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셔서 가능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더 흥하고, 자신의 사역이 점점 쇠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연 예수님이 흥하고 조연인 세례 요한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이며, 이 지점에서 자신은 쇠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던 세례 요한은 자신이 이렇게 사라지는 역할로 임무를 마치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과는 그 실체가 달랐습니다. 이 기쁨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만 드릴 때 맛볼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상식과 논리로 따진다면,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런 경우에 처한다면 마음이 부글부글 끌어서 평안이 아닌 실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할 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는데서 오는 기쁨,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데서 오는 기쁨이 세례 요한의 진정한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4. 글을 마치면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고 말하지만, 과연 우리가 말하는 기쁨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모자람이 채워지고 내 만족이 포만감으로 드러날 때, 물론 우리는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쁨의 기준과 근거와 기초와 축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2020년 1월 한 달을 보내고, 이제 2월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조연인 나는 쇠해지고 주연인 신랑 예수님이 흥해짐으로 감히 이 세상이 이해하거나 흉낼 수 없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표제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골드코스트 온누리교회
양병구 목사
0412 341 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