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③
리드문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어느 나라나 할 것없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곳곳에서 불평등과 불공정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분명 옛날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면서 거리로 나와 외치는 모습을 보면, 과연 우리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혹은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와 같은 갈등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숙제이겠거니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의 말씀 속에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또는 우리의 사회 속에서 지켜져야 할 정의와 평등의 원칙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의와 평등이란 단지 임금을 같게 한다거나 지위를 같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서 차등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을 보는 관점이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람을 부리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모두 다 평등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를 향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학벌이나 빈부나 직위의 차별 없이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인은 모두 죄인 된 신분으로서 평등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분과 사회적 명성과 부와 권력과 가난함을 떠나서 모두를 존귀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서로가 먼저 대접하고 사랑하고 섬기기 시작한다면, 정의와 평등은 더 이상 큰 의미 있는 이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되지 못할 만큼 고상한 자도 없고 우리의 이웃이 되지 못할 정도로 비천한 자도 없는 것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때 평등은 실현된다."
야고보서 2:8-9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대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률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개념은 인간의 이기심일 것입니다. 이기심은 자기 만족과 자기 방어와 자기 이익으로 모든 문제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욕구에 충실하며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을 요구합니다. 결국 한편에서는 “나는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네가 많이 가지면 자연히 나는 적게 갖는다”고 하면서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세계는 모두가 자기 욕구를 위해 싸우는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 힘이 센 강자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 밥이 되거나 들러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사는 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율법을 통해 주신 말씀의 핵심인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사우스포트한인교회 담임
장원순 목사 0433 308 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