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나의 선친(先親) 김철명님은 서양화가셨습니다. 그리고 15년 전 9월 1일 지병으로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아버지는 천재성을 가지신 화가셨습니다.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으셨지만 극장 간판 그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상업 미술로, 한때는 수십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사업가로 활동하셨고, 순수 미술로 발전해서 제1회 현대미술대상전의 대상 작가가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주로 기독교 성화를 그리셨습니다.
아버지는 램브란트를 좋아하셨고, 마네와 모네, 고흐 작품의 색깔과 비슷하셨고, 인물화와 풍경화 모두 잘 그리셨으며 강한 터치로 캔버스에 입체적으로 그리는 그림을 즐겨하셨습니다.
아버지 그림은 한국 작가들의 창작 작품이 교회 캘린더에 막 들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인기가 있어서 전세계의 한인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중 일부는 큰 인쇄물로 제작되어 반포의 기독교백화점에서 판매 되기도 하였습니다.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 작가 김철명.
아버지는 당신께서 탤런트 합격생 출신이라는 것을 자주 자랑하셨습니다. 대가족의 수입을 책임지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그 길을 계속 가지 못하셨던 것을 안타까워하셨고 그 때문이었을까 영화를 참 많이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신이 나셔서 영화의 감독, 배우,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줄줄 이야기해주시면 저와 두 여동생은 신이 나서 듣고, 질문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TV에서 하던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를 밤 늦게 까지 봤던 좋은 추억도 있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움직이는 영상에 대해 동경하고, 반대로 영상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 중에 순간 포착하는 사진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동경하는 분들이 있는데 화가셨던 아버지는 영화 감독이라는 것에 대해 그러하셨습니다.
저한테 공부하라는 말씀은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지만 한 순간을 하더라도 집중하라는 말씀은 자주 하셨고 살짝 곁들여서 “나중에 영화 감독하면 어떠냐?”고 여러 번 부추기셨습니다.
가난한 예술가의 삶과 그런 가족의 삶이 싫었던 저는 단박에 “노”라고 대답했지만 아버지의 치우친 조언(?)에 따라 그 길로 갔으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기생충” 까진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가끔씩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조언이 영향을 끼쳤는지 사촌 형 한 분은 KBS 연기자로 지금도 활동 중이십니다.
헤르만 헤세의 문학 작품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지와 사랑”을 유독 좋아하셨습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마지막 대화를 대사처럼 따라하시면서 그들의 인생 전체를 통해 가졌던 딜레마를 마치 자신의 삶의 고백처럼, 아버지는 그렇게 읊조리셨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저와 여동생들을 불러 놓으시고는 즉흥시를 적게 하시고, 우리가 박수를 치며 기분이 좋게 해드리면 탤런트 시험에 합격하셨을 때 하셨던 연기를 직접 우리에게 공연해주기도 하셨습니다.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동화 속 왕자님”이셨습니다. 예술적이라는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세상 물정은 잘 모르신다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술과 사람들을 좋아하셔서 돈이 들어오면 그 즉시 다 써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림에 한 번 빠지시면 밤을 새워 그리실 정도셨지만 그림 도구 주변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고 덕분에 캔버스를 패널에 꽂던 압정을 수없이 밟았던 기억이 납니다. 일을 벌리고 뒷수습은 가족들 몫이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혈압과 당뇨를 젊은 시절부터 갖게 되셨지만 약도 드시지 않고 술과 담배로 몸이 더 나빠지셨지만 관리를 하지 않으셔서 결국 나중엔 위 천공, 위암, 심장병에 신장 투석까지 하시고 당뇨의 합병증까지 온 몸에 나오면서 안타깝게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셔야 했습니다. 임종 중에 귓가에 시편 23편을 읽어 드리고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찬양을 불러 드렸던 장면이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반 백년을 살다 보니 더 아버지가 그리워집니다. 조금만 더 몸을 관리하셔서 지금까지 살아계셨더라면… 잘 자란 아이들을 보여드리고 싶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여드리고 싶고, 아이들이 가정을 꾸려 손자, 손녀를 낳으면 자랑도 하고 싶고, 아버지께 인생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그림 얘기, 영화 얘기, 주님 얘기 하며 같이 늙어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영화에서 알콜중독으로 죽어가던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 주인공이 휴대용 위스키병을 선물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몸에 물론 좋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웃으며 소주잔을 채워드릴 수 있었을텐데…
히브리서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말년에 병원에서 1년 정도 생활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3일 전 주님께서 아버지와의 작별을 준비하도록 미리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헤어짐에 속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의 굴곡이 많으셨던 아버지가 천국 입성하실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그 좋은 나라에 가겠죠. 그리고 제 아이들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저를 그리워하겠죠.
누구나 그러하듯이…
올해의 아버지의 날 Father’s Day엔 더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지갑에 15년 째 들어가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다시 한 번 꺼내봅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푸른파도교회 김도윤 목사 (0411 725 639)
호프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