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교협 신앙컬럼

은혜의 보좌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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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보좌 앞에


저는 나이 30이 넘을 때까지 두통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것인지, 아니면 두피가 아프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두통을 직접 겪으면서 확실하게 다른 사람이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두통이 어떤 것인지 물어 본 적도 있는데 그 친구도 아주 자세하게 잘 설명해 주었지만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몸소 체험하는 것과는 차이가 많았습니다. 두통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두통을 겪어보지 않은 제가 큰 위로나 도움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잘 이해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잘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호주정부는 비상상태인데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듯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호주정부에서 500명이상 모임을 금지하고 4sqm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할 것을 발표했는데도 본다이 비치에는 더위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 그 다음날 해변을 폐쇄시킨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국 부산에 47번째 확진자였던 사람도 완치가 되어서 자신이 겪었던 증상과 치료과정을 페이스북에 상세히 남겼는데 그 사람은 헬스장에 주5일씩 가서 운동할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손도 수시로 씻었고 손 소독제는 과하다고 싶을 정도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도 몸에 이상이 생겨 검사 받으러 갔다가 20-30분 기다리는 중에 쓰러져서 길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자만했습니다!”

우리 몸에 대해서 우리 자신도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몸소 겪기 전까지는 자만하고 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해변에서 한 청년이 코로나19 감염이 두렵지 않냐는 CBS 기자의 질문에 “코로나요. 뭐 걸리면, 걸리는 거죠”라고 답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뉴욕 주지사는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슈퍼맨, 슈퍼우먼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 당신들은 천하무적(invincible)이 아니다”

자신이 아프기 전에는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노인이 되기 전에는 노인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엇 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가는 제일 첫 단계가 바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롬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 시험 때가 되면 약국에 가서 ‘타이밍’이란 약을 사먹고 공부를 했습니다. 사실 약이라 부르기는 어색한데 잠이 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참 잠이 많을 때라 그것이라도 먹으면 맑은 정신으로 조금이라도 더 공부할 수 있을까 해서 동네 형이나 누나들 하는 것 보고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 사먹어 보고 효과가 없어서 더 이상 사먹지 않았습니다. 먹고도 잠이 와서 할 수 없이 자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잠 올 때 10-20분 정도 잠깐 엎드려 자고 일어나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때는 잘 몰라서 그렇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두통과 함께 제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불면증’이었습니다. 젊을 때는 ‘불면증’있는 사람들의 고통도 모르고 오히려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잠 안 오면 밤새 공부하거나 놀면 되지 왜 고민하냐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동정하지”라는 히브리 원어는 ‘쉼파데오’인데 ‘동정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동일한 감정을 느끼다’, ‘공감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NLT 영어 성경에는 “understand”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동일한 감정으로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기 위해 이렇게 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이해는 사랑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정죄하게 됩니다.

죄스럽다고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이해해 주신다니 얼마나 힘이 나고 감격스럽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골드코스트 브니엘교회

이백민 목사

0412 194 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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