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여러분은 작명을 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어떤 이름을 만들어 내셨나요? 저의 이름은 부모님이 다니시던 교회목사님께서 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밝게 공을 세우라는 뜻에서 명훈(明勳)입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의 이름은 한자로 구성되지요. 이름을 들을 때 한자로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에게 어떤 희망과 미래를 담으려 했을까라는 궁금증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제가 참 근사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하는 몇몇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노아’입니다. 노아의 아버지는 라멕이었는데 창세기 본문에 이렇게 설명되었습니다.
라멕은 백여든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창 5:28-29)
아마도 라멕은 아들에게서 자신들의 세대와는 다른 또 다른 운명을 살아서 부모와 그 세대의 세상을 위로해 줄 것을 바랬던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이 좋은 이름을 쓰는 서양 사람, 한국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라멕이 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고생(이차본)한다” 라고 했는데 이 말속에는 고생의 기원이 하나님께로 돌려집니다. 라멕이 최초의 조상인 아담 이야기를 제대로 몰라서였을 수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고생(이차본)의 기원은 다릅니다. 창세기 3:17절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이차본)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노동과 고생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노동은 땅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며 낙원답게 만드는 신성한 소임이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닮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노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생이 들어왔습니다. 보람과 의미 대신, 자신의 욕망이 쓰디쓴 댓가로 되돌아옵니다. 성경을 유심히 보시면 금기의 열매를 먹었기에 이제 고통가운데 먹고 살다 죽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달게 보였던 그 빗나간 욕망의 열매는 실상 고생(이차본)이었다는 함축이 들어있습니다. 힘들게 일하는 것에 고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고생이 죄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라멕의 바램처럼 노아가 정말 고통 속에 허덕이는 세상을 위로하려면 일 안해도 먹고사는 세상을 만들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멈추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 땅을 버려 놓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노동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아프지 않고, 베고프지않고 가난하지 않는 삶으로 위로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고통에서 놓아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느 인생도 자신의 고통에서 위로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어느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 자신의 고통에서 위로를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0423 932 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