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교협 신앙컬럼

용서한 사람들의 기도 -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윤명훈 목사

오즈코리아 0 3201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 마태복음 6장:9절-13절


용서한 사람들의 기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내용가운데 ‘우리에게 죄진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청원입니다. 그러나 한글성경에서 번역한 ‘죄’라는 용어는 완곡한 해석입니다. 사실상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오페이텔레스’라는 단어입니다.이것은 ‘빚’이라는 단어 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진 빚을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도 탕감하여 주십시오’ 이 청원 가운데는 청원자는 사람에게는 채권자이고 하나님께는 채무자입니다. 그리고 이 빚의 상환방식을 ‘용서’하는 것으로 해결해 가려고 합니다.


사실상 세상에 빚 없이 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내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일이 아니지만 내 것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나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도움을 받아 ‘나’라는 영역을 만들고 때가 이르면 그 도움으로부터 독립하여 이제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로 나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은행 빚 만이 빚이 아니라 우리의 출생에서부터 빚의 인생은 시작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문제는 자신을 만들어 가는 빚인가 아니면 자신을 파멸시키는 빚인가 입니다. 다시 말에 빚 없이 사는 인생이 되기 위해 어떤 도움과도 단절되는 고립된 인생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빚을 다룰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이 빚과의 공생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인식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단계는 자신이 다른 이의 도움을 얼마나 받고 있나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은행을 비롯한 많은 금융기관의 전문가들이 성공적인 대출상환을 위해 주는 조언가운데 하나는 채무자가 자신의 빚의 규모에 대한 건강한 식별력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내 의무(liability)을 인식하며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나의 빚이 얼마인가에 대한 인식을 놓쳐버리는 순간부터 빚이 사람을 삼키는 그 무서운 과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파멸의 과정은 한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 국가에도 그대로 재현됩니다. 화려한 도시와 문화를 보며 우리나라 국력이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외국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빚을 지고 있는가를 망각해 버리면 그 국가의 자생력은 결국 상실되고 경제적인 식민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빚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립’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존’으로 고착된다면 그 순간부터 채무자는 노예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현실적인 ‘갚기(repayment)’의 계획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과정은 채무자가 진검승부를 내어야하는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빚을 빚으로 갚은 방식은 장기적인 계획일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자생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결코 자립의 기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외채를 갚기 위해 성공적으로 외자를 유치할 수 있는 대통령의 능력도 시기적절한 때에는 빛나는 리더십이라 평가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리더십은 자생력을 키워 나가는 리더입니다.


현재 중국경제는 희망과 불안의 평가가 모두 공존하는 상태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이 외국투자를 통해 국가적 자생력을 증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길러준 물을 먹고 사는 기생적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우물을 파려는 것입니다. 중국제품은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중국의 경제를 폄하하는 것은 균형 잡힌 현실인식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중국제품은 경쟁력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싸다’라는 인식을 넘어 ‘쓸만하다’는 인식을 확보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얻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빚에 관한 긍정적인 방향이라면 중국은 그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 익히 알고 계시는 빚에 관한 상식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빚 진 자’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우리’ 인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하나님께 빚을 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갚으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도가운데 등장하는 ‘우리’는 이토록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우리’가 진 빚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하나님의 도움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빚에 관한 첫번째 상식은 내 빚이 얼마인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공기며, 흙이며, 자연, 모든 만남 등등을 열거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데 우리가 우리 되기 위해 누리며 사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만드신 마음의 공간을 함부로 죄악 된 생각들을 들여다 놓고 사는 모습 또한 하나님의 권리주장에 대상이 됩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탕감해 주셨습니다.그것에 대한 빚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진리와 은혜라는 ‘사랑의 빚’입니다. 이 빚은 법적 의무로 상환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따라 스스로 ‘조금이나마 하나님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랑의 빚을 스스로 감당하기 위해 주기도문의 ‘우리’가 취하는 방식은 ‘용서’입니다. 내 도움을 입어서 살지만 스스로 갚을 능력이 없어 스스로 더 깊은 어둠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탕감’을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빚을 사랑으로 상환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이 우리 신앙의 진검승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실력이고 현금이며 내 영혼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줌으로 이 빚을 갚아라”

갚으십시오. 무능력한 채무자로 살아가지 마시고 당신이 하나님께 진 은혜의 빚을 당장 갚으십시오.그게 마땅한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


골드코스트 비전장로교회

담임목사 윤명훈, 0423 932 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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